선제적 위기관리에 대한 무관심

2년 전, 한 기업의 CEO가 국내 조직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무엇인지 질문한 적이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필자에게 해당 CEO는 국내 조직(정부, 기업, 학교 등)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위기관리 역량이니 이 부분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해 달라고 당부해왔다.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어보니 국내 조직은 그동안 혁신 등 앞으로의 미래 성장에 대한 고민은 많이 하는 편이지만 예상치 못한 대외 변수, 노사 갈등 사태 등 퇴보 가능성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위기관리라는 용어가 새로운 트렌드는 아니다. 해외 학자 및 경영자들은 1970년대부터 꾸준히 그 필요성을 얘기해왔다. 국내 역시 1997년 IMF 사태로 국내 경제가 곤두박질친 이후 위기관리의 시급성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상당수 조직은 예상치 못한 변수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발생한 위기에 정부, 기업, 학교 모두 사후적으로 대응하고 있기에 그 어려움은 현장에서 가중되고 있다.

기업 CEO들에게 위기관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하면 대부분 돌아오는 답변은 이렇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고 불확실한 위기에 기업의 자원과 노력을 투입해야 하느냐는 반문이다. 글로벌 경제 불황, 중동 정세 불안으로 인한 유가 급등, 메르스나 코로나19와 같은 예상치 못한 질병 발생, 강력한 노사 대립 등 통제할 수 없고 가늠할 수 없는 요인이 많은데 어떻게 일일이 대처해야 하느냐는 반문은 어쩌면 기업 현장에서 땀 흘리고 있는 대다수 임직원의 고민일지 모른다.

비상 상황에 대처할 시나리오 수립의 필요성

기업 현장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임직원들의 볼멘소리가 틀린 건 아니다. 어떤 요소를 위기로 정해야 하는지 그리고 위기 중 어떤 요소는 불가항력적인 특성이 있는데 여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게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 드는 것도 일정 부분 이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발생한 위기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것과 사전 매뉴얼을 통해 철저하게 대처하는 건 피해를 최소화하는 측면 그리고 모든 구성원들의 위기의식을 철저하게 정립하는 효과 등 근본적으로 그 파급효과가 질적, 양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군사전략 측면에서 주로 사용된 위기관리 개념이 기업 차원에서도 부각된 이유는 세계 최대 석유회사였던 로열 더치 쉘이 석유 파동 사태 때 미리 수립한 위기 대응 시나리오를 통해 선제적으로 위기에 대처하고, 이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중동 정세가 심각하다고 느낀 경영진은 기획부서를 통해 불확실성에 대처할 수 있는 위기 대응 시나리오를 수립했다. 이후 1970년대~1980년대 발생한 오일쇼크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고, 수익률 최하위 메이저 석유 기업에서 일약 수익률 최고의 메이저 기업으로 로열 더치 쉘을 성장시켰다.

다른 기업들이 오일쇼크에 대해 우왕좌왕하는 사이 로열 더치 쉘은 기획부서의 체계적인 분석 과정을 통해 도출한 시나리오별로 대응, 설비투자 축소와 제품 품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조직의 전략을 신속히 수정,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탄탄한 성장 과정을 밟았다. 그러나 위기가 대부분 미증유(未曾有)의 사태이고 시나리오를 수립하는 것 자체도 워낙 지난하고 복잡한 과정이기에 그 이후에도 위기관리의 중요성을 인식한 기업가나 정부의 고위 관리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9?11테러다.

로열 더치 쉘에서 시나리오 플래닝을 수립하는 데 참여한 피터 슈워츠는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라덴의 테러가 발생하기 7개월 전, 미국의 심장부에 대한 테러 공습이 발생할 수 있다는 장문의 위기관리 보고서를 백악관에 제출했다. 이른바 미국 본토 테러에 대한 위기관리 대응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미국 역사상 뉴욕, 워싱턴 등 본토 공격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시나리오 자체가 지나치게 허황되다는 이유로 백악관은 테러 대비 시나리오를 무시했고 그 결과 역사상 최대의 비극을 맞이했다.

피터 슈워츠는 어떻게 위기를 예측할 수 있었을까? 시나리오 플래닝 기법의 전략가들은 위기는 항상 되풀이되고 징후가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인리히 법칙처럼 사소한 문제라고 우리가 치부했던 것들이 결국 유사한 문제 또는 갈등을 증폭시키고, 사람들이 이를 외면하는 사이 결국 대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 것처럼 말이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중국 현지 경험을 통해 위생 환경의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는데도 중국 당국은 이를 무시했고, 결국 우한 지역에서 대규모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떻게 시나리오를 수립해야 하나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함을 주장하며 관련 시나리오를 사전에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위기는 없다고 단언한다. 테러나 국제 정세 불안 역시 수많은 갈등이 누적된 이후 발생된 결과다. 코로나19와 같은 질병 역시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등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질병의 패턴을 통해 언제든지 예측, 대비할 수 있는 위기라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노사 갈등, 기업의 성과 부진도 부서 이기주의와 구성원들의 무사안일 의식이 쌓여 나타나기에 혜성처럼 돌발하는 위기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위기에 대해 시나리오를 수립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환율, 유가, 인구 변화, 질병, 테러 등 기업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변수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제 가능한 내부 위기, 환경적 불확실성 등 통제 불가능한 외부 위기로 상황을 구분하고 현재 상황에 ±30~50% 이상의 가능성을 염두하고 기업에서 곧바로 변화해야 할 전략, 자원, 인프라, 조직 요소는 무엇인지 정밀히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구성원들의 불안 및 위기로 인한 심리적,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시나리오는 또한 최악의 상황을 염두하고 수립해야 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 관해 정부는 초기 과할 정도로 위기에 대처하라고 각 부처에 주문한 후 사태가 완만해지자지나치게 불안을 갖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지역 사회 감염 등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태가 발생하자 정부는 긴급 비상상황을 재차 선포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해당 위기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각오로 철저한 대응책을 사전에 마련하지 않았기에 변화된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메시지와 반응이 나온 것이다.

시나리오를 최악의 상황으로 가정해서 수립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각 단계별로 기업의 전략, 자원, 인프라, 조직 대응 방침을 이에 맞춰 확정해야 구성원들이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동일한 방향으로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 둘째, 경영진의 위기관리 대응 메시지가 시나리오에 의해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준비된 시나리오에 따라 구성원이 행동하면 경영진은 변화된 환경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고 구성원에게 늘 동일한 방향의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내놓을 수 있다.

2015년 메르스 이후 2020년 코로나19 사태를 겪기까지 우리는 또 한 번 위기관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현재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대다수 국내 기업은 비상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한 상황이다. 국제통화기금(IMF) 또한 현재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한 위기관리 대응책에 골몰하고 있다. 위기관리는 조직의 혁신 및 성장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는 지금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선제적으로 위기에 대처하면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지만 무방비 사태로 위기를 맞이하면 크나큰 재앙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