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에 나이 지긋한 선배들이 꽤 있어 종종 노후 준비에 대해 이야기한다. 최근 도시 외곽 혹은 지방 전원주택으로 나간 퇴직 선배들이 하나같이 힘들어하더라는 얘길 들었다.
이유를 듣지 않아도 그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심 연구실에서 평생 읽고 쓰며 살던 사람이 그 바깥으로 나가 자연을 벗하기 쉽겠는가. 감상의 대상으로서 자연과 달리, 삶의 터전으로서 자연은 터프하다. 백면서생이 탐하기엔 버거웠던 것이다.
퇴직 후 산 좋고 물 좋다는 곳에 정원과 텃밭이 있는 자연친화 주택을 지은 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퇴직하고 나서가 더 힘들다, 잡초가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알아? 집을 내놓았는데 사는 사람은 없고,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냥 살고 있어." 시골로 내려간 것을 골백번도 더 후회하고 있다는데 듣고 있자니 비극이 따로 없다.
실패담을 늘어놓는 퇴직 선배들의 공통점은 노후설계 전문가의 조언과 정반대 선택을 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나이 들수록 거처의 공간을 조금씩 줄이면서 도심 쪽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조언한다. 수입이 줄고 체력이 달리니 집 평수를 줄이고, 노환에 대비해 편의시설이나 병원이 가까운 곳에서 여생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거 공간 선택 말고도 악수를 둔 몇몇 퇴직 선배들이 있다. 사기당해 퇴직금을 잃은 선배, 말버릇을 못 고쳐 노년을 고독하게 보내는 선배, 인생 2막을 열겠다며 장사를 시작했다 쪽박 차고 집에 들어앉은 선배도 여럿 있다. 역사와 국제정치 분야에서 교훈을 도출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평생을 보냈건만, 정작 자신의 인생은 제대로 돌보지 못한 셈이다.

최근 노년을 준비하는 자세에 참고할만한 좋은 글을 읽었다. 우리 사회를 수축 사회로 정의하면서, 과거를 잊고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먹고 살기도 힘든 시대가 됐다고 진단했다( < 수축사회 스타트…과거 성공 경험 잊어라> 동아비지니스리뷰 2019년 4월호).
수축 사회의 특징은 변동성, 불확실성, 복잡성, 모호성이다. 저자는 예측 가능한 안정적인 세상은 끝났다며 생존을 위해 지켜야 할 세 원칙을 제시했다. 글의 지향은 우리 사회가 안정적 미래를 도모하기 위한 대원칙인데, 개인이 안정적 노후를 준비하기 위한 대원칙으로 바꿔 읽어도 좋을 듯하다. 풀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 은퇴 직전의 경제 상태, 교우 관계, 평판이 은퇴 이후에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그러니 돌다리 두드리는 심정으로 탄탄한 길, 옳은 길을 가야 한다. 노년을 대비하는 정도를 우리는 알고 있다. 금전적으로 저축, 투자, 여유자금을 착실히 쌓아놓는다. 육체적으로 근력, 유연성을 기르고 정기 검진을 받는다. 포용, 이해, 양보의 미덕을 기르며 한발 물러나 세상을 보는 노인의 정신을 가진다. 이런 경지는 하루 이틀 노력으로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젊을 때 미리 은퇴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둘째, 과거를 회상하는 바람직한 방법을 익혀야 한다. 중장년 이상의 세대는 "내가 왕년에 말이야…"로 시작하는 아재 무용담 늘어놓기를 좋아한다. 과거를 남에게 털어놓는 것은 나에게도, 그것을 들을 상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래전 미국 브루클린에서 월세 살 때, 집주인은 은퇴한 디제이였다. 젊었을 때는 한 달에 서너 번 하우스 파티를 열고 반기에 한 번 외국 여행을 했으며, 평일에도 브로드웨이에 나가 오페라와 뮤지컬을 맘껏 즐겼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파티, 외국 여행, 오페라 관람을 할 수 없었다. 저축 없는 상태로 퇴직하면서 아파트 방 두 개를 모두 월세로 내놓고 자신은 커튼으로 가린 거실 구석에서 생활했다.
노년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그는 좋았던 과거를 아름답게 회상하는 방법을 몰랐다.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그에게 남는 것은 부정적 감정과 비탄이었다. 과거에 봤던 뮤지컬을 거실 구석에서 소리 죽인 DVD로 보며 술을 마시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종교-봉사 단체를 통한 집단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힘든 현재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또한 사소하게라도 운동-여행-전시회 관람 등을 균형 있게 즐겨야 과거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한다. 브루클린 은퇴 디제이는 이런 연구 결과와 정반대로 행동했던 셈이다.

셋째, 새로운 수입을 찾고 지출 구조를 뒤집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 패턴 전반을 되돌아보고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은퇴 이후 별다른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현실을 인정하고 지출 우선순위를 바꿔야 한다. 이때, 구체적 사고, 상상력, 실천력을 동원해 노년의 활동들을 젊을 때부터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만약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뮤지컬 관람만은 포기할 수 없어라고 생각한다면 뮤지컬을 볼 수 있는 돈을 따로 저축해두면 된다. 단순화하자면, 일주일에 만원을 저축해 20년 준비하면 1,040만원으로 충분히 보고 싶은 뮤지컬을 볼 수 있다. 혹은 뮤지컬 극장에서 잡일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방법으로도 욕구를 충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자니, 한 친구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좀 오버 아니야?"라고 물었다. 아니다. 다음과 같은 사례가 오버라고 할 수 있다. 축구를 미친 듯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장교 출신인 그는 가는 부대마다 축구 클럽을 만들고 대회를 열었으며 다수의 조기축구회에 가입했다. 그는 쇄골과 발목의 골절, 몸에 남아있는 철심 9개를 자랑하면서 전역 이후에도 계속 축구를 고집했다. 얼마 전에 만나보니 양 무릎에 인공관절을 넣고 철심이 박힌 곳을 어루만지며 동네 산책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축구를 대체할만한 다른 취미를 미리 만들지 못해 생긴 비극이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서 박창이로 분한 이병헌이 이런 대사를 한다. "재미있는 건 말이야. 사람들은 언젠가 반드시 죽을 거란 걸 알고 있는데도 말이야. 마치 자신은 안 죽을 것처럼 행동한단 말이지."
연장 선상에서 보면 사람들은 언젠가 반드시 늙을 거란 걸 알고 있는데도 마치 자신은 안 늙을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모두 늙는다. 늙으면 벌이가 크게 적어지고, 마땅히 즐길 여가가 줄어들며,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변화에 맞닥뜨리고 나서야 대응하려 하면 늦다.
백세 시대, 백이십세 시대는 반드시 온다. 다행히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은퇴 이후 노년을 대비하지 않으면 큰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미리미리 준비하면 좋은 노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 오늘부터라도 이 세 가지 철칙을 참조해 차근차근 준비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