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싱턴 DC를 관통하는 포토맥강

일터를 옮길 때마다 이런 얘기를 많이 듣는다. "여기 사람들 다 이상해." 상담 요청을 받을 때도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여긴 롤-모델이 없어요."

어느 날 연극하는 A가 "이쪽 판에는 롤-모델이 없어요"로 시작하는 푸념을 털어놓았다. 마음먹고 전업 배우의 길로 들어섰는데 아사리판도 그런 아사리판이 없더라는 것이다. 일단 얘기를 들어주고 네 주변 동료, 후배들도 너와 같은 생각이냐고 물었다. A는 대답했다. "전부 다 그래요. 보고 배울 사람이 없다고."

A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주변의 롤-모델이 되어주면 되잖아. 다들 누군가 자신을 끌어주길 바라고 있으니까 그게 문제지. 그 누군가를 기다리지 말고 네가 보고 배울만한 사람이 되어주면 안 될까?" 이 조언을 해주고 집에 돌아와 잠시 포토맥강과 한강을 떠올렸다.

2012년 연구원으로 워싱턴DC에 있을 때 좋아했던 것 중 하나는 조깅이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포토맥강을 따라 뛰노라면 뭐라 말할 수 없는 고양감을 느꼈다. 강변 풍경도 좋았지만 사람이 만드는 도심 풍경이 더 좋았다. 헤드폰을 끼고 조깅하는 사람,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 아이스크림을 들고 대화하며 산책하는 사람 등 다양한 인간군상이 워싱턴DC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귀국하고도 조깅 습관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한강 변 가까운 곳에 집이 있어 여건은 좋았다. 한강의 풍경 또한 포토맥강의 그것만큼이나 좋았다. 그러나 사람이 문제였다. 스피커로 트로트를 크게 틀어놓고 뛰는 사람, 소리 내어 길가에 침을 뱉는 사람, 시커먼 선바이저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토시 찬 팔을 크게 흔들며 이상하게 걷는 사람, 민소매 속옷만 입은 채 배를 까고 벤치에 앉아 눈을 굴리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런 경험을 털어놓자 친구는 "한국인에게 내면화된 서양 콤플렉스 때문에 괜히 미국 풍경, 미국 사람이 좋아 보이는 것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사람들 많은 산책로에서 캭캭 소리 내며 침 뱉는 게 보고 듣기 싫은 것도 내 서양 콤플렉스일까? 하는 의문은 남았다.

이후에도 비슷한 주제로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대화는 대개 "한국 사람들 정말 이상해"라든가 "여긴 매력적인 사람들이 없단 말이지" 하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그런 대화는 대부분 뒷맛이 찜찜했는데, 이유는 그 한국 사람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끄럽게 트로트 틀어놓는 사람, 도깨비처럼 이것저것 뒤집어쓰고 다니는 사람 탓해봐야 변할 건 없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된 조깅 복장을 정갈히 입고 한강을 따라 뛴다면 누군가는 나를 좋은 강변 풍경의 일부로 기억하지 않을까. 그런 모습이 누군가를 바꾸고 그런 연쇄작용이 결국엔 사회 전체의 변화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쯤 되면 내가 타인의 모범이 되고, 주변을 바꾸고 싶으면 내가 먼저 변하자는 투의 고리타분한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이 사진을 보자.


▲ 패니 팩을 메고 찍은 재러드 레토의 사진. 재러드는 외출을 할 때 항상 패니 팩을 착용했다. 출처= ⓒ텀블러

사진 속의 인물은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조커 역으로 잘 알려진 배우 재러드 레토다. 록 밴드 30 Second To Mars의 리드싱어이기도 한 그는 할리우드의 섹시한 남자를 거론할 때 항상 순위권에 오른다.

그런 그가 메고 있는 것은 촌스러움의 대명사, 패니 팩(Fanny Pack)이다. 우리가 허리 가방, 전대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재러드는 2014년부터 이 패니 팩을 꾸준히 메고 다녔다. 위 사진처럼 말이다.

재러드는 수년 동안 고집스럽게 패니 팩을 매고 다녔고, 패니 팩은 2016년 패셔니스타들이 즐겨 착용하는 패션 잇템으로 지목됐다.

한 패션 전문 매체는 "패니 팩은 가장 큰 오해를 받아온 패션 아이템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촌스러움의 대명사였던 패니 팩은 이제 힙(hip)하고 실용적인 젊은이들의 애용품이 됐다. 재러드는 스스로 패션계의 롤-모델이 됐다. 남들에게 변화를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했다.

성경에 이런 일화가 있다. 소돔이라는 마을의 타락과 범죄가 너무 심해 신이 이곳을 멸망시키려 했다. 그때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 열 사람 있으면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신은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열 명의 의로운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없던 일로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신은 또 그러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국 그 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결국 소돔은 없어졌다.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주변 탓, 남 탓하지 말고 내가 그 한 사람이 돼서 다른 이의 롤-모델이 되고 좋은 여건을 만들어나가면 된다. 사회가 각박하다고 개탄만 하지 말고 내가 먼저 주변 사람을 챙기면 된다. 사무실 환경이 열악하다고 불평만 하지 말고 내가 틈틈이 청소하고 정리하면 된다.

변화와 혁신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고 아름답게 만드는데 대통령이 앞장서서 국가정책과 수십억의 예산을 투입할 필요는 없다. 지금, 나부터,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실천하고 주변부터 바꿔나가면 된다. 바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사무실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