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아무리 섬세하다고 하지만, CEO쯤 되면 나름 카리스마를 날리면서 부하들을 압도하기 마련인데, 민 사장의 경우에는 그런 것을 별로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한 그녀였는데, 어디서 그런 영도력이?

직원들을 잘 ‘멕여서’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는데, 회사를 방문한 순간 그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이 좋아 중견 제조업체지, 중소 제조업체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여러분들도 잘 알지 않는가? 그러나 한 가지 느낌으로 다가온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왠지 따뜻한’ 회사 분위기였다.

낡은 공단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작지만 잘 정돈된 현장, 최신 시설하고는 거리가 먼 소박한 현장이었지만, 그렇다고 우중충한 구석도 보이질 않는 그런 곳! 대충 감이 잡히는가? 그렇다고 간단히 볼 것도 아닌 것이 직원이 무려 200명이나 되었다!

이쯤 되면 사장실 분위기도 파악될 텐데, 바로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어느 동네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용감한 우리들의 아줌마 모습으로. 이런 그녀가 ‘천의 얼굴’을 가졌단 말이지? 찬찬히 뜯어본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흰머리가 아주 매력적이신데요?’ 아~흐! 내가 들은 첫마디가 분명 칭찬이렸다! 이놈의 인기는 잘 식질 않아서. ‘하아, 그런가요?’ ‘그렇게 곱게 물든 경우가 별로 없는데, 회색빛 행커칩하고도 잘 어울리네요.’ 대화 초반에 난 그렇게 간단하게 그녀에게 접수되고 있었는데,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칭찬!’ 말이다.

의상에서 피부 관리를 거쳐,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표정에 이르기까지 한바탕 훑고 나서야 본론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이미 상당히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고(?), 끈끈한 동지애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일은 해야 한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 잡고 질문을 던졌다. ’직원들 관리가 남 다르시다고?‘

‘관리요? 전 그런 거 안 하는데...’ ‘아니 커뮤니케이션이 남 다르시다고?’ ‘커뮤니케이션요? 그런 거도 잘 모르는데...’ ‘천의 얼굴을 가지셨다고?’ ’옝?‘ ’아니 뭐랄까, 직원들과 관계가 좋으시다고?‘ ’아~예, 뭐 조금...‘ ’특별한 뭐라도 있으신가요? ‘글쎄요. 다른 사람들보다 꼼꼼하게 챙기긴 하죠.’ ‘아! 바로 그겁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시는지?’ 순간 소형금고를 열어 뭔가를 꺼내는 그녀. ‘이게 참고가 되실지 모르겠네요...’

빠직! 내가 알고 싶었던 바로 그것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청색 비닐을 뒤집어 쓴 업무용 다이어리 말이다. 거의 뺏듯이 잡아채 열어본 그녀의 다이어리는,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다이어리가 아니었다. 아니, 그저 겉모습은 그런 다이어리였지만, 그 안에 적힌 내용은 사춘기 소녀의 깔끔하게 정리한 학습용 노트였다!

일단, 총천연색이었고, 군데군데 밑줄 쫘아악. 어디 그 뿐인가? 갖가지 표정의 크고 작은 캐릭터와 말풍선이 등장하는. 남학생들이 보면 자지러지고 마는, 거의 참고서 같은 노트였던 것이다. 물론, 내용은 지리나 국사 같은 따위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노트 한 번 그녀의 얼굴 다시 한 번 번갈아 지켜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원래 학교 다닐 때, 노트를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취미였거든요. 공부는 별로 잘하지 못했지만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정리를 해둬야 마음이 편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다만, 지금은 직원들에 관해서만 정리를 하죠.’

순간 ‘싸부!’하는 말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겨우 참고, 급칭찬을 해주었다. ‘이 노트가 모든 걸 말해주네요.’ ‘나중에 회사 도서관에 기증할까 하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더 말해 뭐하겠는가? 직원이라면 누구라도 이 노트를 열어 몇 페이지를 읽는 순간, 전율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노트에는 직원 개개인의 신상, 가족관계, 아이들 최근 근황까지, 요즘에 표정이 밝은 지 어두운지, 어두우면 왜 어두운지, 고민이 뭐고 자신이 해줘야 할 일이 뭔지, 배우자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아이가 어떤 학교를 들어갔는지까지, 당사자의 말은 물론 주변의 이야기까지, 무엇보다 본인의 느낌과 언제 어디서 만나서 무슨 말을 해줬는지까지 꼼꼼하게 기록돼 있었다. 물론 이름은 본인만이 아닌 이니셜로 처리돼 있었다. 혹시 누가 볼 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노트야 말로 정말 천의 얼굴을 가진 노트였는데, 노트 정리를 더럽게 못했던 나 같은 소년들에게는 정말 꿈도 꿀 수 없는 일을 그녀는 감히 이 나이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트를 기록하는 게 제 취미라면 취미기도 해요.’ ‘왜, 아니겠습니까?’ 잠시 그녀의 다이어리를 들춰보면서, 난 천의 얼굴을 가졌다는 그녀의 변신에 대해 연신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만남 이후, 난 ‘여자들이 네트워크에 약하다’는 가설을 완전히 접기로 했다. 세상에 대체 어떤 놈이 그녀처럼 정교하게 사람들을 관리, 아니 챙길 수 있단 말인가! 헤어지기에 앞서 슬쩍 그녀에게 이 가설을 들려줬다. 그녀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글쎄요? 저도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전 생각이 좀 달라요. 그 가설도 남자들이 만들어낸 것 아닐까요? 여자들은 절대 이런 건 할 수 없을 꺼야 하는 심리에서 나온.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제가 본 성공한 여성 직장인들은 대부분 네트워크에 강한데요. 오히려 전 여자야 말로 네트워크를 잘할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자들은 네트워크에 약하다는 가설로 승진 기회를 박탈하고, 남성들만의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싶겠지만, 술자리 접대가 아닌 다른 방식, 오히려 더 섬세하고 친근한 방법으로 여자들이 네트워크의 강자로 등장할 날이 곧 오지 않을까요? 보험회사 영업사원이나 야쿠르트 아줌마들을 보세요. 학습지 교사들은 또 어떻고요. 영업, 아주 잘 하잖아요?’

결국 집안의 남자와 집밖의 남자들이 발목을 잡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훨씬 더 많은 역사를 이뤄낼 수 있을 거라는 지적이었다. 더욱이 요즘은 그녀들도 술자리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네트워크 관리 방식에도 조만간 새로운 바람이 불 것이란 느낌이 ‘팍’ 와서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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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