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부터 4학년제 대학 졸업 후에 입학하는 의학·치의학 전문대학원이 도입된다. 소위 말하는 미국식 4+4에 따른 8년제 의학박사 제도이다.
필자는 생명과학 관련 기초과학분야 교수로서 이 제도가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이공계 대학을 고사시키고, 또 하나의 고시·의학고시(?) 열풍까지 몰고 올 것으로 우려한다.
4년제 대학 졸업 후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벌어질 입시경쟁과 이공계 학생들에게 줄 혼란은 사법·행정고시가 인문학을 황폐화시키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이공계 대학을 흔들어 놓을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게 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1970년대 고도성장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고,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의 암울한 터널을 지나 반도체·자동차의 수출에 힘입어 우리 경제가 회생하게 된 밑바탕에 이공계 대학에서 훈련된 우수한 인재들이 있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우수한 인재들이 수학·물리·화학·생물 등의 기초과학과 공학을 공부한 뒤 연구소나 기업에서 개발한 신기술이 우리의 수출산업을 선도해 왔다. 즉, 우수한 이공계 대학의 경쟁력이 바로 우리나라의 경쟁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이공계를 전공한 학생 중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의학전문대학원에 대거 진학하려 할 경우, 이미 심해진 이공계 기피현상으로 우수한 인재를 찾기 어려운 이공계대학에 인재난이 가중될 것이다. 중병으로 긴급수혈이 필요한 환자로부터 또 피를 뽑아가는 형국이다.
의학전문대학원 제도를 도입한 측에서는 기초과학이 튼튼한 의사·의학자를 만들자는 취지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학입시난을 해결하기 위해 인기학과인 의예과와 법학과는 전문대학원으로 만들어 고교 졸업생이 직접 지원할 수 없도록 하면 입시지옥이 완화될 것이란 것이다.
논란 끝에 결국 법조계의 반대로 법학전문 대학원은 무산됐으나, 의학전문대학원은 의과대학 학장협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의과대학과 대다수의 치과대학이 2005년부터 도입키로 결정했다.
기초의학 연구력을 갖춘 대학들은 이 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반면, 상대적으로 연구기반이 취약한 대학의 의·치대가 의학전문대학원 제도를 채택한 것을 보면, 기초과학이 튼튼한 의사·의학자를 배출하겠다고 내세운 명분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알 수 있다.
의학전문대학원 제도는 입시지옥을 해소하기는커녕 입시지옥을 4년 연장할 것이며, 더불어 이공계 대학을 ‘고시촌’으로 만들 것이다. 선진국 중에서도 미국 이외에는 4+4 제도로 의학교육을 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의학전문대학원 제도의 도입은 아직은 열악한 우리의 의료서비스 현실과는 동떨어진, 지극히 미국적인 의학교육 제도이다. 우리보다 선진국인 유럽 각국과 일본도 우리와 유사한 학부 6~7년 제도이다.
의학전문대학원 제도의 시행은 의학교육 기간을 현행보다 2년 연장함으로써 국가적으로도 낭비가 적지 않다. 의학도들도 3년간 군복무를 해야 하므로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늙은 의사를 배출하게 된다.
2005년부터는 매년 약 500명의 우수한 이공계 졸업생들이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 4년 뒤에는 의사가 돼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게 될 것이다.
반면, 이공계 기피현상으로 우수 인재를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데려올 정도로 어려워진 국내 이공계 대학원은 더욱 황폐해질 것이다. 의학전문대학원의 도입이 이공계 대학의 우수 인재 공동화 현상을 일으켜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학부 전공으로 훈련된 의사·의학자가 필요하다면, 의학전문대학원 대신 현행 편입학(복수전공) 제도를 활용하는 등 대안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 柳王植 연세대 교수·생화학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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