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사설/칼럼]
“시장은 수단이고 복지는 목적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민주당 후보 경선 시절에 천명한 일성(一聲)이다. 일단 이것이 노 당선자의 진정한 소신이라면 이는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시장의 ‘천박성’과 복지의 ‘후진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정치철학이라 평가하고 싶다. 역대 어떤 대통령도 이러한 일갈(一喝)을 행한 적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동안 복지는 ‘수단’이었고 정권유지 또는 성장 그 자체가 ‘목적’인 시대를 살아왔으며 그 관성에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로 인해 우리에게는 경제규모로는 세계 10위권에 육박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동시에, 사회복지 지출비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멕시코를 제외하고는 최하위를 면치 못한다는 치부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걱정해야 하는 것은 결코 이러한 국제 비교 상의 아이러니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상위 10% 부유층의 평균 소득수준이 하위 10%의 그것보다 9.8배나 높고, 아직도 하위 50%는 IMF 경제위기 이전의 실질소득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위 10%는 19%나 실질소득이 증가하는 대조를 보인다.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60% 수준에 이르고 있는데 이들의 사회보험 가입률은 20%대에 머물러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의 혜택으로부터 수백만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벗어나 있다. 3백80만 노인 중 6%만이 공적 연금의 혜택을 받고 있고 그들 중 10%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상의 정부 보조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가정해체율이 전 가구의 7% 수준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1백만가구가 정상적인 가정 형태를 이루고 있지 못한 상황에 있으며, 15만명의 아동이 끼니를 거르는 극단적 방임상태에 놓여있으나 이들에게는 고작 250여개의 공부방만이 민간의 온정 차원에서 다가올 뿐이다.
1백50만 장애인의 실업률은 28.4%이며, 이들의 평균임금은 상용근로자의 48% 수준에 그치고 있다. 20대 후반에 전체 취업 여성의 30%가 퇴직하여 육아에 전념할 수밖에 없어 노동의 연속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주택보급률은 명목상 100%에 다다르지만 공공주택의 비중이 2.5%, 서울권의 실제 주택보급률이 79.7%에 그치는 상태에서 전세가격의 폭등으로 수백만가구가 주택의 하향선택을 해야 하는 현실이다.
바로 우리 사회의 이러한 일그러진 자화상은 우리 스스로 선진 국민으로서의 자존심을 갖게 할 수 없음은 물론, 선진국가의 대열로 가기 위한 꾸준한 경제성장의 동력을 생성하지 못하는 질곡이 되고 있다. 우리가 20세기 후반기 내내 경제성장 제일주의의 신화 속에 얽매여 살면서 얻은 결과가 개발도상국 중 선두주자라는 지위였지만, 반대급부로 지불한 혹심한 대가가 IMF 경제위기로 대변되는 고통과 지금의 빈부격차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21세기의 새로운 정부에 대하여 새로운 주문을 할 수밖에 없다.
즉 이제는 ‘성장의 신화’가 아니라 ‘분배의 신화’를 만드는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지 않는, 아니 오히려 이를 강화시킬 수 있는 성장과 분배의 관계를 찾아내는 지혜를 발휘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혜는 결코 이카루스(Icarus)와 같은 신기루가 아니다. 성장과 분배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서로 이분되어 있지 않은 것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찾아질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지혜임에 틀림없다. 전후 서구의 복지사회가 우리에게 웅변으로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정치안정없는 경제성장을 바라지 않듯이, 사회정의없는 경제성장도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도 ‘분배의 신화’를 일구는 대통령을 가질 때가 되었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질적으로 성숙해지리라는 점을 성숙한 시민은 감지하고 있다. 모쪼록 새 정부에서 사회복지에 대한 정책기조가 새로운 전환점을 낳기를 강력히 희구한다.
〈이태수/현도사회복지대 사회복지학 교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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