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냉대 갈수록 심해져… 기능올림픽 13차례 우승 ‘상처 뿐인 영광’
실업계 고교에 호칭 바꾸기 바람이 분 적이 있다. 상업고등학교는 ‘정보고’로, 공업고등학교는 ‘전자고’ 등으로 문패를 바꿔 달았다. 산업 흐름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학교 이름에서 가능하면 ‘실업계’라는 흔적을 지워 한명이라도 학생을 더 많이 끌겠다는 학교쪽의 절박한 요구가 숨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 기능인 양성의 요람이었던 실업계 고교는 이제 존재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지난 9월19일 폐막된 제36회 세계기능올림픽에서 또다시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93년 대회에서 대만에게 한차례 우승을 빼앗긴 것을 제외하고, 77년부터 지금까지 13차례 대회 우승을 모두 휩쓴 기념비적인 성과다. 이런 실적을 보면 마치 우리나라의 기능인 양성 정책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르다. ‘기능한국’의 깃발을 세계에 내걸게 했던 우리 기능인들이 실제로는 그에 걸맞은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가 기능공이었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알게 될까봐 내내 쉬쉬하며 가슴 졸였다.' 지금은 항공기 부품을 제조하는 중소기업에서 상무로 재직하고 있는 유아무개씨는 자신이 한때 기능공이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세계의 기능공들과 자웅을 겨루던 그 시절을 잊었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기능올림픽 메달리스트 김아무개씨는 최근 기능공 생활을 청산하고 정수기 외판원을 시작했다. 또다른 메달리스트는 지금 고향에서 꽃게잡이 어선을 타고 있다. 이들에게 기능올림픽 메달리스트란 그저 추억 속의 영광일 뿐이다.
물론 기능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사회로부터 큰 박수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근대화,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1970~80년대 기능올림픽에 나가 우승한 우리 기능공들은 귀국 후 카퍼레이드 행진 속에 환대를 받았고 매스컴은 대대적으로 이들을 치켜세웠다. 대통령은 이들을 불러 식사를 함께 하며 격려하고 특별 격려금까지 주기도 했다. 이런 국민적 관심으로 한국의 기술력은 발전했고, 이는 다시 세계 속에 메이드인 코리아의 깃발을 힘차게 높이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아주 달라졌다. 이번 36회 기능올림픽 준비과정을 보면 사태의 심각성이 피부로 와닿을 정도다. 개막일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선수들은 합숙 훈련장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다. 인기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보도하는 매스컴도 그들의 굵은 땀방울은 애써 외면했다. 열악한 지원 속에 가까스로 부산의 한 공업고등학교에 합숙캠프가 차려졌다. 선수들은 저녁 5시면 꺼지는 에어컨을 원망하며 연신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선수들을 가르치는 지도교사도 지원을 받지 못했다. 하루 5만원에 불과한 ‘지도비’는 사회 각 부문에서 한창 일할 나이의 지도교사들에겐 ‘나라를 위해 봉사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홀대와 무관심 속에서도 선수와 지도교사들은 또 한번 종합우승을 일궈냈다. 그제서야 매스컴도 우리 선수들의 활약상을 앞다퉈 보도하기 시작했고, 기능한국의 위상을 더욱 제고해야 한다고 요란을 떨었다.
실업계 고교 위상 뿌리째 흔들
하지만 앞으로도 기능인대회에서 계속 이런 성과를 거둘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잘라 말한다. 기능인 양성의 기반인 실업계 고교의 위상은 이미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떨어져 있고, 기능공들에 대한 사회의 홀대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정부는 이같은 문제에 속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고, 기능공 양성을 위한 지원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해진 상태다. 기능올림픽선수회 회장인 이용복 홍익대 교수는 '2년 후에 열리는 차기 대회부터는 누적된 문제점들이 불거져 기능한국의 입지가 좁아지게 될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기능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돼 있는 학벌중시 풍조는 기능인들에게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다. 개인의 능력을 학벌로 평가하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사회기여도 중심의 평가체계로 바뀌지 않는 한 ‘기능한국’의 깃발은 이제 내려야 옳다는 것이다.
실업계 고등학교에 대한 사회의 잘못된 인식도 더 나쁠 수 없는 지경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가는 곳이 실업계 고등학교라는 우리 사회의 인식은 기능인들에게 큰 상처로 남는다. 어느 아파트 단지에 공고 부지가 확정되자 주민들이 마치 혐오시설이 들어서기라도 하는 듯 반대시위에 나섰다는 얘기는, 기능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기능올림픽 선수 지도교사이기도 했던 한양공고 채성범 교사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지원하는 학생 수가 워낙 많이 줄었지만, 실업계 고등학생들도 취업과 기능 습득이 아니라 전문대나 4년제 대학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며 옛날과 달라진 현실에 씁쓸해한다.
현장의 기능인들은 나날이 벌어지는 사무직과 생산직 노동자의 격차도 참기 어렵다고 말한다. 소득 격차는 말할 나위도 없고, 승진 기회와 노동 조건의 격차도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것이다.
기능올림픽에 출전한 우리 선수들이 흘린 땀은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의 노력에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방대회에서 3위 안에 들어야 한다. 그런 선수들만을 모아 전국대회를 여는데, 여기서도 1위를 해야 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기능올림픽이 2년마다 한번씩 개최되기 때문에 1위 합격자 두명은 마지막 한명이 남을 때까지 경합을 벌인다. 실로 어마어마한 땀을 흘려야 한다. 그 어려운 과정을 뚫고 1위를 차지한 마지막 한명이 대회가 열리기 6개월 전부터 합숙을 하며 올림픽에 대비하게 된다. 기능올림픽선수회 이용복 교수는 '올림픽대회 입상자는 수능시험 우수자보다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기능올림픽에 모든 나라들이 참가하는 것도 아니다. 기술 선진국을 중심으로 30~40여개 나라만 참석한다. 왜냐하면 섣불리 기능올림픽에 출전했다가 자칫 입상하지 못한다면 기술력을 의심받아 수출전선에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수들 합숙훈련장도 변변히 없어
우리나라가 너무 과학·기술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과학·기술과 기능의 차별이 외국에 비해 너무 심하다는 이야기다.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과학자의 몫이라면, 그 신기술을 제품화하는 사람은 기술자다. 그리고 그 제품을 실제로 만드는 사람이 바로 기능인이다. 정부가 국가적 과제로 내세우는 ‘정보화 사회’를 거품 없고 내실 있게 실현하기 위해선 정보통신 기술의 개발 못지않게 관련 기기를 제작하고 다루는 기능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과학기술자가 소프트웨어 역할을 한다면, 기능인들은 하드웨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회의 홀대에 상처받은 기능인들에 대해 정부는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기능올림픽선수회 이용복 회장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위한 기념회관은 있는데도 기능올림픽 선수들이 합숙훈련을 할 기능회관은 단 하나 지어주지 않고 있다'며 정부의 무관심에 화살을 들이댄다.
우수한 기능인들을 어렵사리 키워내고도 그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내모는 정책과 인식이 지속된다면, ‘기능인’의 꿈을 꾸는 어린 싹은 우리 사회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기능인이 사회에서 존경받고 우대받도록 하는 유럽이나 일본의 기능인 정책이 부러울 수밖에 없다.
<한겨레 닷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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