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창업으로 성공한 한국인이 제법 있다. 푼돈만 들고 대한해협을 건너가 커다란 물류 기업을 세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귀금속 가공단지에서 손기술을 마음껏 뽐내는 재주꾼도 수두룩하다. 이들이 일하는 현장을 찾았다.
도쿄=김동호 특파원“일본 귀금속의 70% 우리가 만들죠”
1. 장인의 나라서 대접 받는다, 우에노 한국인 귀금속 가공단지
일본 도쿄에서 인파가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우에노(上野) 공원 근처의 ‘우에노 한국인 귀금속 가공단지’. 귀금속 가공 기술만 갖고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들이 창업에 성공해 집단을 이루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최근 현장을 방문했다. 20여 년 전 이곳에 진출한 김경진(51) 사장이 운영하는 ‘금공예’에 들어서자 귀금속들이 번쩍였다. 25명의 직원은 저마다 디자인·설계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고, 가공 기술자들은 책상 모양의 작업대에 앉아 세심한 손동작으로 귀금속을 빚어내고 있었다.
“탁탁 탁탁.” 다이아몬드 반지 한 개를 가공하고 있던 김진동(41)씨는 “고급 백화점 내 귀금속 가게에서 시가 25만 엔(약 320만원)짜리”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 반지 한 개를 완성하는 데 하루가 꼬박 걸린다”며 “정교한 가공이 필요한 반지여서 여러 명의 손을 거친다”고 말했다. 올해 귀금속 가공 경력 15년차인 그의 작업대는 가공에 필요한 도구나 귀금속 부스러기로 다소 어지러웠지만 금·은, 다이아몬드·루비·사파이어·에메랄드 같은 눈부신 보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도쿄 우에노 한국인 귀금속 가공단지의 기술자들.
<한국인들이 우에노에 진출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육성한 전북 익산(당시 이리)의 귀금속 가공업 단지는 당시 일본 업체들의 주문을 받아 보세 가공의 특수를 누렸다. 그러나 높은 관세 때문에 부담이 늘어난 일본 업체들은 아예 한국인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재일본 한국인귀금속협회 조성안(52) 회장은 “이들이 동료를 한두 명씩 불러들이면서 한국의 귀금속 기술자들은 도쿄 우에노와 야마나시(山梨)현 등으로 대거 유입됐다”고 말했다. 야마나시는 원석 가공을 위주로 하고, 우에노는 상품화 단계의 가공이 유명하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현재 일본 귀금속 가공업계는 한국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조 회장은 “일본 전체 귀금속의 70%는 한국인의 손을 거쳐 가공된다”며 “고급 주얼리는 거의 대부분이 한국인 장인들의 손을 거치고, 베트남·중국·태국에서는 일반 제품이 제작되고 있다”고 말했다. 우에노에만 현재 1000명가량의 한국인 기술자들이 일하고 있다. 자녀들은 대부분 일본인 학교에 다니면서 빠른 경우 2세들이 벌써 대학생이나 사회에 진출하는 등 일본 속의 한국 일자리를 키워가고 있다.
주일 대사관 김현중 총영사는 “우에노 가공단지는 전 세계 교민 중 단일 업종으론 최대 규모”라며 “한국인의 해외 고용 창출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종업원 4~5명의 소형 가공업체가 많지만 금공예를 운영하는 김경진 사장처럼 규모가 제법 큰 회사도 있다. 한국에 파견돼 한국인들에게 가공 기술을 가르치다 금공예에서 부사장으로 채용된 고야나기 가즈오(小柳和男)는 “한국 기술자들은 금·은·보석 가공 분야에서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장인(匠人)의 나라’인 일본에서 한국인이 장인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에겐 지금도 취업 기회가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금공예 김 사장은 “전문직이기 때문에 10년 이상의 경력이 있어야 취업비자가 나온다”며 “빈자리가 생기면 수시로 인력을 모집한다”고 밝혔다.
<물론 최근 우에노 귀금속 가공업자들도 불황의 한파에 시달리고 있다. 조 회장은 “세계 불황의 여파가 본격화한 지난해 10월 이후에는 일거리가 절반 이하로 떨어져 매출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불황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귀금속 소비가 줄고,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귀금속 수요는 가장 늦게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월평균 70만~80만 엔에 달하던 수입이 많은 경우에는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고 털어놨다.
그래서 귀금속협회는 사업 영역 확대에 나서고 있다. 첫 시도가 마케팅 능력을 키워 재일 한국인을 상대로 직접 판매에 나서는 것이다. 조 회장은 “고객인 일본의 판매업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직거래 판매 노하우도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23~24일 우에노 ‘라 베르오라무’ 플라자에서 열리는 직판 행사는 주일 대사관·대한민국민단·한국무역협회 등이 후원에 나선다.
“일본 항구에 보세창고 가진 유일한 한국인”
2. 헝그리 정신으로 일어섰다, 나승도 국제익스프레스 사장
세계 5000개 회사와 거래한다는 나승도 사장.
<일본에서 한국인으론 최대의 종합물류 사업을 하고 있는 나승도(48) 국제익스프레스 사장. 지난달 28일 요코하마(橫濱) 야마시타(山下) 부두에서 개최된 ‘한국공동물류센터’ 개소식에 나타난 참가자들의 면면은 그의 사업 규모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일본 기업의 해외 무역 활성화를 지원하는 일본무역진흥공사(JETRO)를 비롯해 요코하마 부두 관계자와 일본 관세사 등 물류 업계 거물 1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문을 연 한국공동물류센터는 KOTRA가 대일 수출 한국 기업의 물류비를 절감하고 수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도입한 시스템이다. 현재 미국·영국·중국·브라질·러시아·벨기에 등 11개국에서 운영하고 있지만 일본에는 처음이다. 나 사장은 일본의 쟁쟁한 물류 업체를 물리치고 이 물류센터의 사업자로 선정됐다. 그는 “세계 어디서나 항만 업무는 지역 업체가 장악하고 있어 보수적인 일본에선 영업 발판을 마련하기가 더욱 어려웠다”며 “국내 중소기업들은 일본에 수출할 만한 제품이 있어도 제품의 통관·배달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 창고처럼 사용할 수 있는 물류센터가 일본에 문을 열게 됨에 따라 한국 기업들은 제품의 보관·유통은 물론 마케팅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됐다. 이 센터를 이용하는 기업들은 KOTRA에서 매년 628만원의 정부 지원금과 함께 약간의 비용을 추가하면 해외 지사 대행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다.
일본에서 이 센터가 만들어진 것은 나 사장이 운영하는 국제익스프레스가 일본 내 굴지의 물류 업체로 성장한 덕이었다. 그는 “종합물류센터를 운영하려면 통관업·운송업·창고업 등 10여 개 면허를 갖춰야 한다”며 “일본 기업도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추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한국인 특유의 헝그리 정신이었다. 그는 “조금 귀찮고 불편하더라도 고객 편에서 생각하고 고객에게 가장 이익이 되도록 선택을 한 것이 회사가 급성장한 비결”이라고 했다.
이날은 그가 19년 전 단돈 60만원을 쥐고 일본에 건너와 시작한 영세 이사 업체 운영자에서 명실상부한 물류 전문 업체 사업가로 떠오르는 날이기도 했다. 일본어를 한마디로 못 하던 그가 일본에 건너온 것은 1990년 2월. 해외에서 창업해 보겠다며 무작정 도쿄(東京)로 건너온 그는 일본어를 배우러 다녔던 일본어학원에서 일찌감치 “어차피 일본어는 잘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신 유학생들의 이삿짐 수요가 적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 그는 아르바이트 직원 두 명을 데리고 이삿짐 배달을 시작했다.
나 사장은 “서너 명 알고 있던 유학생을 통해 인맥을 넓혀 나가면서 이삿짐 이용을 부탁하는 편지를 직접 써서 보냈다”고 말했다. 당장은 필요하지 않더라도 국제익스프레스 전화번호를 메모해 놓은 유학생이 의외로 많았고 이들 중 상당수는 귀국할 때 나 사장을 찾았다. 고객은 유학생에서 주재원으로 확대됐고 3~4년 뒤에는 해상 택배와 종합물류사업 쪽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한·일 간 교류가 급증하면서 부품·소재와 농수산물의 수출입, 문화재·공연 장비 수송이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그러나 여기서 벽에 부닥쳤다. 그는 “물류 사업을 위해선 보세창고 확보가 필요했지만 외국인으로선 쉽지 않았다”며 “재일동포를 포함해 한국인 전문가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해 직접 개척에 나서기로 했다”고 술회했다. 그래서 항만 분야에서 20~30년 이상 일한 일본인 관세사들을 잇따라 간부로 영입했다. 정부 관료부터 항만 노조 관계자까지 두루 찾아다니며 고개를 숙였다. 그 결과 지금은 도쿄·오사카(大阪)·요코하마 등 일본의 3대 항구에 대형 보세창고를 갖게 됐다. 한국인으로 일본 항만에 보세창고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서울·부산에 사무실을 두고 중국 칭다오(靑島)에도 진출한 그는 “거래 회사가 세계 5000개사에 이른다”고 말했다.
회사 매출은 지난해 말 30억 엔에서 올해 40억 엔을 넘어설 전망. 그는 일본 물류 업체의 큰손이 된 만큼 앞으로는 일본통운·긴테쓰 같은 대기업과 경쟁할 예정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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